이광우 대표/발행인(전 부산일보 이사)
이광우 대표/발행인(전 부산일보 이사)

SBS의 사찰 보도…냄새가 난다

SBS가 뜬금없이 ‘사찰’ 관련 '단독' 보도를 했다.

SBS는 2021년 2월 8일 저녁뉴스에서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이 18대 여야 국회의원 299명 전원을 상대로 개인 신상 정보가 담긴 문건을 만들었고, 지금도 그 문건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그중 21대 국회에서도 현역인 의원은 29명이다”라고 보도했다.

이어서, 출처는 ‘국가정보원 고위 관계자’이며, 이 관계자는 자신이 문건의 존재를 직접 확인했고 해당 문건에는 의원들의 치부가 담긴 내밀한 정보와 부동산 거래 내역, 탈세 여부 등이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문건 작성 시점이 MB정부 권재진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인 2009년 9월 이후로 추정되며,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여야를 망라해 국정 방해 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지시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은 화답을 했다.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 국정원의 사과와 내용 공개 등을 주장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자칫 나라가 뒤집힐 수도 있는 일”이라며 “이런 사안에 대해 어떻게 (정보)공개 청구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느냐”고 강조했다.

그런데, ‘여권 편향 방송인' 김어준씨의 화법으로 말하자면 왠지 냄새가 난다. 특히 SBS 보도의 출처인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문건의 존재와 내용을 확인했다고 했는데, 매우 중요한 팩트 가운데 하나인 작성 시점에 대해서는 ‘추정’이라며 교묘하게 비켜섰다.

그렇다면 이건 슬쩍 정보를 흘려서 어딘가를 압박하거나 화들짝 놀라게 하거나 이간질하려는 더러운 정치공작으로 봐야 온당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일련의 흐름은 친이계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인 박형준씨를 겨냥한 음모에서 비롯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박 후보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비서관과 보좌관을 지낸 ‘MB맨’인데, 국정원 사찰 문건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2009년에는 정치적 사안을 총괄하는 정무수석으로 재직했었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산업부의 민간인 사찰 DNA

문재인 정권에서는 어떨까.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말대로라면 도청이나 사찰 같은 사악한 일은 1도 없을 것 같다.

잠시 기억을 되살려보자. 김의겸은 2018년 12월 한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이 문재인 정부의 민간인 사찰 행위를 폭로했을 때 공식 브리핑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태의 원인을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유전자에는 애초에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김의겸의 이 말은 ‘문재인 정부에는 사찰 DNA가 없다’는 한 줄짜리 문장으로 요약 정리돼 인구에 회자됐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최근 검찰이 산업통상자원부 등의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 사건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두 가지가 드러났다. 하나는 ‘북한지역 원전건설 추진 문건 삭제’ 건이고 다른 하나는 산자부 등이 탈원전 반대 시민단체와 원전 운영 주체인 한국수력원자력 노조 등을 사찰했다는 의혹이다.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시민단체 동향 파악 문건, 시민단체가 경찰에 제출한 집회신청서까지 들어있었다. 어쩌면 사찰 의혹이 (북한 원전 추진보다)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라고 적었다. 나는 동의한다.

시민단체는 산업부 장관과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자 산업부에서는 "사찰이 아니라 통상적인 동향 보고 수준으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비겁한 변명 혹은 말장난일 뿐이다. 검찰 세월호 특별수사단은 ‘기무사 사찰’을 두고 ‘유족의 언행을 확인하거나 인터넷 검색 등의 방법을 사용해 유족의 동향과 정보를 수집한 다음 보고서로 작성하고 지휘계통에 따라 보고했다’고 밝혔다.

이 논리대로라면 ‘동향 보고’ 운운한 산업부는 사찰을 자인한 셈이 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한 장면, 중앙정보부장이 사무실에서 도감청을 하고 있다(사진: 영화 스틸컷).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한 장면, 중앙정보부장이 사무실에서 도감청을 하고 있다(사진: 영화 스틸컷).

사찰의 유구한 역사

이번에는 조금 먼 시점으로 이동해 보자.

19대 총선 직전인 2012년 3월 말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문건이 공개됐다.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대통령 하야’까지 거론했다.

이때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신도 사찰 피해자이며,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 모두 문제가 있으니 특검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은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위원장이 노무현 정부 때 사찰이 있었다고 주장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서운 거짓말’, ‘물타기’란 표현을 썼다. ‘노무현 정권에는 사찰 DNA가 없다’는 얘기였다.

나는 의아해서 칼럼을 하나 썼다. 해당 부분만 간추려서 옮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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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고문의 주장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우선,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직원이 넉 달 동안 유력 대권후보(이명박 대통령) 주변을 광범위하게 불법 사찰한 죄가 인정돼 유죄 판결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국무총리실 산하 조사심의관실이 정치인과 민간인을 사찰하면서 불법 계좌 추적까지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 김대중 정부의 국정원은 신형 장비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전화번호를 대량으로 입력하기만 하면 되는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R-2를 개발해냈고,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 CAS까지 개발해냈습니다. 2005년 검찰 수사 결과, 김대중 정부가 도청한 사람 수가 1천 명을 넘었고, 도청 책임자였던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구속까지 됐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김대중 정부 시절의 권력 실세였던 민주통합당 박지원 최고위원은 며칠 전 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부터 사찰 정신이 아들딸들에게 전수되고 있다.“

저는 도청으로 단죄를 받은 전 정권의 실세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던지는 걸 보고 아연실색했습니다.

당연히,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국민을 불법 사찰한 건 헌법(제17,8조)을 위반한 것으로서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단죄를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식의 뻔뻔한 태도 역시 단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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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도돌이표…아프고 슬프다

그때 그 칼럼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는데,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니, 아프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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