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우 대표/발행인(전 부산일보 이사)
이광우 대표/발행인(전 부산일보 이사)

1.

2021년 2월 4일 부산고법 형사1부(곽병수 부장판사)가 역사적인 판결을 내놓았다. ‘부산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이미 실형을 산 두 사람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었다.

나는 재판부의 이 말에 유달리 관심이 갔다.

“피고인들이 고문을 받은 상황에 대한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당시에 같이 수감 돼 있었던 이들의 진술 등을 보면 피고인들의 주장이 상당히 진실 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 피고인들을 범인으로 지목한 피해자의 진술도 신빙성이 없다.”

이 말을 들으면서, 판사란 ‘주장의 진실성이나 신빙성’을 가려내는 사람이고, 그러다 보니 직업상 거짓말을 싫어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겠다, 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판사들은 피고인이 거짓말을 할 때 ‘개전의 정(잘못을 뉘우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이 없다면서 형량을 더 높여버리곤 하지 않는가.

2.

나는 직업상 거짓말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보아왔다.

오래전,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그날 기자들은 현장 진입을 시도하면서 경찰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자 ‘독사’라 불리던 형사반장이 뛰쳐나와 한 기자의 목을 움켜쥐더니 막말과 함께 밀쳐냈다.

기자들이 형사과장을 찾아가 강하게 항의하자 그는 “나는 관여한 바가 없는데, 허 그놈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하면서 반장에게 책임을 미뤘다. 반장은 다음 날 기자들을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망측한 일이 일어났다. 형사과장과 형사계장, 형사들 그리고 일부 기자들이 해당 파출소에 차려진 수사본부에서 현장 녹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피해자의 모습이 지나가고 화면에 방안의 어수선한 모습이 비쳤을 때, 느닷없이 형사과장의 격앙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000! 기자 새끼들 기어들어 오려고 하잖아. 빨리 안 막아!”

반장은 그러니까 과장의 질타 탓에 화가 난 상태에서 기자의 목을 움켜쥔 것이었고, 과장은 기자들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잠시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기자들은 말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음 날 형사과장을 염두에 두고 부산일보 지면에 ‘보안에는 귀신, 수사에는 무능’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사실 원본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세평 즉,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등신’이란 표현을 원용한 것으로 ‘보안에는 귀신, 수사에는 등신’으로 돼 있었는데, 데스크에서 ‘등신’을 ‘무능’으로 ‘마사지(순화)’했다.

이 경찰서에서는 과장 외에도 여러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그래서 때로는 이게 이곳의 문화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검사와 판사들은 오만하거나 폐쇄적이었을지언정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특정 사안에 대해 확인 요청을 했을 때 ‘확인해 줄 수 없다’고는 했지만, ‘그런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래전, 부산지검의 한 특수부장도 그랬다.

사회적 관심도가 높은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부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000 ‘오늘 몇 시’에 소환하나?”

실은 넘겨짚은 것이었다.

부장은 흠칫 놀라면서 “‘오늘 소환’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라고 되물었다. 그리고는 아차 싶은 모양이었다. 얼떨결에 소환 사실을 확인해 준 셈이 돼버린 것이었다.

나는 내친김에 ‘몇 시에 오느냐’ ‘이런저런 혐의로 부르는 게 맞느냐’고 물었는데, 그다음부터는 “수사 중이라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부장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내가 공사석에서 만난 검사들과 판사들의 경향성은 대체로 이러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김명수 대법원장

3.

그런데, 며칠 전에는 기가 막히는 법원 발 거짓말을 하나 접했다. 법원의 정점에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이하 호칭 생략)이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적인 문서를 통해서였다. 사건 개요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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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문은 지난 3일 김명수가 국회의 탄핵 움직임을 이유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이하 호칭 생략)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명수는 국회에 대법원 명의의 정식 답변을 보내 그런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 임성근 측은 전격적으로 두 사람 간의 면담 녹취록을 공개했다. 녹취록을 보니, 김명수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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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는 이번에는 기자들에게 입장문을 보냈다.

“약 9개월 전의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했던 기존 답변에서 이와 다르게 답변한 것에 대하여 송구하다.”

민망한 변명이었다. 그는 판사로서 피고인들이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를 숱하게 봐 왔을 터인데, 그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임성근은 결정타를 보탰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앞에서는 이 말 하고, 뒤에서는 딴말하고… 거짓말 한 사람을 그냥 두면 안 된다. 나한테 말한 그 정도 말을 기억 못 한다면 대법원장을 하면 되겠나.” (동아일보 2월 4일자 인터뷰 기사)

여론은 폭발했다. ‘김명수는 거짓말의 명수’…

나는 임성근의 동기인 사법연수원 17기 법조인들이 성명서에서 한 말이 특히 와 닿았다.

“(…)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는 (…) 일국의 대법원장으로서 임성근 판사와의 대화 내용을 부인하는 거짓말까지 하였다. 그리고 녹음파일이 공개되자 비로소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법원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다수의 법관으로 하여금 치욕과 자괴감을 느끼게 하였다. 탄핵되어야 할 사람은 임성근 판사가 아니라 바로 김명수 대법원장이다.”

나는 이들이 거론한 ‘치욕’과 ‘자괴감’의 질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제삼자인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니까.

새삼, 내가 이런 나라에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니, 슬프고 아프다.

■ 추신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녹취록이 공개된 그 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자신의 거취를 의논하러 간 자리에서 대법원장과의 대화를 녹음해 공개하는 수준의 부장판사라면, 역시 탄핵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과연 그럴까?

기자들은 개별 만남 때 녹취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 말이 빨라서 받아적기가 힘들 때, 훗날 당시의 대사와 분위기를 정확히 복기할 필요가 있을 때 그리고 증거를 남기고 싶을 때다. 그럴 때면 동의를 얻어 녹음하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고 녹음하기도 한다.

증거를 남기고 싶다는 건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취재원은 나중에 문제가 되었을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우기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당연히 녹취록은 결정적인 증거자료가 된다.

녹음이 힘든 시절에는 취재원을 만날 때 그날의 기온, 구름의 모습, 기분, 풍경 따위 소소한 것들을 수첩에 메모하기도 했다. 소송 때 기사의 진실성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녹취가 수월해진 요즘은 그런 번거로움이 훨씬 덜해졌다. 요컨대, 이러한 녹음 행위는 자기방어를 위한 일인 셈이다.

임성근은 김명수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앞에서는 이 말 하고, 뒤에서는 딴말하고”라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임성근은 ‘을’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녹취록이 없었다면 국민들이 과연 대법원장과 사법농단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는 부장판사의 말 중에서 누구의 말을 더 신뢰했겠는가. 나는 이번 녹취록 공개를 ‘을의 통쾌한 한방’으로 이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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