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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후배인 외과 교수가 조수로 들어와 있던 레지던트 선생에게 갑자기 수술칼을 건넵니다."이 수술. 네가 해. 할 수 있겠지?”“….” 주저주저. 내가 보다가 안타까워,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선생. 뭐해? 교수가 칼을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얼른 받아야지. 빨리 시작해.”이윽고 후배 교수의 감독과 지도 아래, 긴장된 두 시간 정도의 수술이 끝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 후배에게 내가 물었습니다.“박 교수. 옛날 첫 집도 하던 때 기억나? 그때 내가 마취했지. 그때 선생이 수술 후에 고맙다고 나를 찾아와서 캔커피 하나 주고 갔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교수/의사 김기준
2024.04.23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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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명의란 어떤 의사일까요? TV와 신문에서 각 분야의 명의라고 발표하고, 치켜세웁니다. 심지어 명의의 순서도 암묵적으로 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근거에서 명의로 정했는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어떤 근거로 실력을 평가했는지, 도무지 오리무중입니다. 환자를 많이 보아서? 수술 개수가 많아서? 돈을 많이 벌어서? SNS 및 언론플레이를 잘해서? 논문을 많이 써서?내가 아는 어떤 젊은 교수는 자조하는 듯, 많이 죽여보아야, 많이 사고를 쳐 보아야 명의가 된다고 합니다. 참 서글펐습니다.나는 후배나, 제자들에게, 스스로에게 자주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교수 김기준
2024.03.21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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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늘 같은 수술실에서 같이 일을 해왔던, 은퇴를 앞둔 외과 교수님과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소주 몇 잔씩을 주고받으며, 지나간 시절의 추억에 대하여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 학생 때부터 레지던트 시절을 거쳐, 교수 시절까지 쭉 흘러옵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말씀하십니다.“김 교수. 외과의 발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해?”“소독법, 페니실린 발견 등이 아닐까요?”“그렇지. 그것도 중요하지. 그런데, 요즘 생각해보니 마취의 발달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아. 옛날에는 마취가 외과의 일부분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교수 김기준
2024.03.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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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콘드리아 근병증환자를 간혹 마취합니다. 발생 빈도는 4천 명 가운데 1명 정도이며, 대부분 20세 전후에 증상이 나타나는, 신경 유전 질환입니다. 원인은 미토콘드리아 DNA의 돌연변이입니다. 이로 인하여, 세포질 속에 있는 미토콘드리아의 형태적, 기능적 이상이 발생하고, 미토콘드리아의 고유 기능인 에너지(ATP) 생성에 장애가 생깁니다.따라서 미토콘드리아 근병증의 임상 양상도 우리 몸에서 에너지 요구량이 많은 조직과 기관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기관은 중추, 말초, 자율신경 및 시신경, 망막을 포함하는 신경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4.02.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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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은 기울 경(傾)자와 들을 청(聽)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울 경’자는 ‘내 몸을 기울인다’ 즉,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듣기의 자세를 의미합니다.인터넷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풀이해 놓았습니다. 왕의 귀(耳+王)처럼 귀를 크게 열고, 10개의 눈(十+目)으로 자세하게 보며, 말하는 이의 마음과 같은 마음(一+心)으로 들어라. 한마디로 하면, 몸으로도 듣고, 눈으로도 듣고, 마음으로도 듣는 것. 참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거룩할 성(聖)자에 귀가 맨 먼저 나올까요. 말 잘 하는 것보다 잘 들어주는 것이 더 성스러운 것인가 봐요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4.02.0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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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찬비가 내리던 새벽, 서울역에 내렸더니, 위압적으로 굽어보던 거대한 대우빌딩. ‘나 여기서 생존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예과 1학년 시절은 신촌로터리 근처에 있는, 허름한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습니다. 간간이 청소도 하고, 사장님 일도 돕고, 밤에 경비도 서며, 그렇게 생활비도 일부 보충했습니다.하숙집을 구하지 못할 만큼, 고향집 사정이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부산에서 다니던 학교를 자의로 그만두고, 상경을 한지라, 아마도 혼자 해결해보자는 자존심과 ‘이 나이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4.01.0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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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골프 라운딩을 나갑니다. 가끔 내기도 하죠. 내가 맨 마지막 티샷. 파 세이브만 하면, 이 홀은 내 것입니다. 떼어 놓은 당상입니다. 지난번에 이 홀에서 버디를 낚았거든요. 거의 홀인원. 가장 좋아하는 7번 아이언을 보란 듯이 빼서 듭니다.연습 스윙을 두어 번 해 봅니다. 감이 좋습니다. 바람도 없습니다. 한 번 더 연습 스윙을 한 뒤, 티를 꽂고 공을 올립니다. 괜히 잔디를 바람에 날려봅니다.다시 뒤로 물러서서, 아이언으로 방향을 가늠합니다. 어드레스 후, 멋지게 공을 날립니다. 공은 보기 좋게 그린 뒤쪽에 있는 벙커에 퍽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12.1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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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현관문 비밀번호가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집니다.아내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아내의 전화번호는 무엇일까? 생각이 날 듯 말 듯. 입안에서 뱅뱅 도는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 전화번호는? 이건 더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혹시 아내의 이름은? 다행히 기억이 나,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겁니다.“당신 요즘 왜 그러세요? 술 좀 줄이세요.”새벽까지 강의 준비로 부산했던 토요일 아침, 학회 강의를 가는 아내로부터 다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11.2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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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멀건 설렁탕 국물과 투가리 부딪히는 소리와 말없이 애먼 깍두기 씹는 정경이 서럽고 애잔한 눈물이 되어 흐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함민복 시인의 유명한 시의 제목이죠.나에게도 대학 1학년 독서실 시절에,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쩌다 설렁탕 집에 가면, 이 시가 생각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을 위해 소주를 시킵니다. 시인 한 잔, 나 한 잔. 술은 둘이 마시는데, 취하는 건 오로지 나입니다. 눈물이 찔끔 납니다. 그런데 나의 눈물에서는 항상 파의 매운맛이 먼저 묻어납니다.사람의 눈물샘에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10.19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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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을 먹고, 수술장 창가에서 먼 산을 바라봅니다. 싱그런 초록이 짙어지고, 산들산들 나무가 흔들리는, 기분 좋은 유월의 오후였습니다. 수석 전공의로부터 긴급한 전화가 옵니다. 추락사고로 인한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급하게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다고 했습니다.10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20세 소녀. 현재 의식 없음, 두개골 손상 추정. 경추 골절 및 폐손상으로 인한 호흡부전. 간 및 비장, 콩팥 등 내부 장기 손상으로 인한 출혈로 쇼크 상태, 그 외 다발성 골절. 차트를 살펴보니 참으로 끔찍했습니다.수술을 해서 살아난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09.2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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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좋아하시나요? 지금은 많이 식었지만, 한때는 롯데 자이언츠 광팬이었습니다.바람 넣은 주황색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신문지를 찢어서 둘둘 말아 흔들며,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부산갈매기’를 목청껏 불렀던 추억의 사직구장. 가장 좋아했던 선수는 연세대학교 선배인 최동원 투수였습니다.최동원 선수의 특기는 무쇠팔에서 뻗어 나오는 시속 155km에 육박하는 불꽃 같은 강속구였습니다. 낙차 큰 커브 또한 명품이었죠.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끈, 19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 선수를 좋아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7전 4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09.1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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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가 되는 과정은 길고도 고단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되려면 의대 또는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진학을 해야 합니다. 의대로 진학하면, 예과 2년을 마친 후, 본과 4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 일반 대학과정 4년을 마친 후,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면 역시 4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의사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됩니다.여기에서의 공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나 때의 경우, 180명이 입학해서 120명이 겨우 졸업했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시험 또 시험. 평가 또 평가. 그 고단한 시간이 흐른 후, 국가고시를 보고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08.29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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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때, 5일마다 여는 새벽시장을 쏘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괜히 공부가 되지 않거나 힘이 들 때면, 새벽 5시쯤 일어나 한바탕 돌아보곤 했죠.새벽시장을 좋아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거기 가면, 싱싱한 활어처럼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열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왠지 나도 살아있다는 느낌, 힘차게 살아내야지 하는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되더라구요.그래서 힘들고 지쳐 삶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주위의 지인들을 보면, 새벽시장을 한번 가보라 주저 없이 권합니다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08.15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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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 환자로부터 장기를 기증받아 새로운 삶을 사는 이들과 그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의 장기를 기증함으로써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나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만큼 뇌사 환자의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1979년에 뇌사 환자로부터 기증받은 장기의 이식 수술이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 2월에야 비로소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고,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Korean Network for Organ Sharing, KONOS)가 만들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08.03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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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 의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마취 관련 합병증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무섭게도 ‘악성고열증’입니다.일반적으로 마취 도중에는 환자의 체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보온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그러나 악성고열증인 경우, 체온이 분당 섭씨 0.5도 이상씩 상승하며, 심지어 체온이 섭씨 43도 이상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것이죠.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진행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대처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이 병은 상염색체 유전자 이상으로 발생하는 아주 드문 유전병의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07.1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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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마취통증의학교실 교수 겸 시인의 수필을 연재한다. 김 교수는 연세대 의대를 나왔고,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 출연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내 연구실 책상 위에는, 깜찍한 인형 3개가 놓여있습니다. 한 아이는 말끔한 의사 가운 차림의 테디베어 곰돌이, 한 아이는 겨울왕국의 예쁜 엘사 여왕, 한 아이는 폭신폭신 말랑말랑 귀여운 모찌 인형 블루입니다. 이들은 힘들 때 나의 말을 들어주는 귀한 친구이자, 간혹 나의 마취를 도와주는 조력자들입니다.아기들이 마취와 수술을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의사 김기준
2023.07.0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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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마취통증의학교실 교수 겸 시인의 수필을 연재한다. 김 교수는 연세대 의대를 나왔고,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 출연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김기준의 마취과 의사
교수 김기준
2023.06.28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