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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臺)는 뜻이 여럿이다. 대개는 흙이나 돌로 쌓은 높은 지대를 이른다. 높은 지대에선 바라보는 풍광이 빼어났을 터. 그래서 풍광 빼어난 곳을 대라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숫자 8을 선호하는 중국은 지역의 대표적인 풍광 여덟 가지를 내세워 무슨 팔경이라고 추켜세우는 전통이 있었다.조선도 그랬다. 조선 곳곳에 팔경 또는 팔대가 있었고 그 전통은 지금껏 이어진다. 는 부산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 주영택 선생이 2022년 펴낸 부산 향토사 역저다. 주 선생은 이 역저에 부산 8대를 소개했다.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4.24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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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림(平林)은 이백 시에 나온다. 평림막막연여직(平林漠漠煙如織). 저녁연기 아련하게 피는 평화로운 마을 내지는 이상향쯤 되겠다. 복숭아꽃과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한 무릉도원 연장선상이다. 아침저녁 물안개 자욱했을 물가 평평한 곳의 지명으로선 손색이 없다. 뜻이 향긋하니 평림을 지명으로 쓰는 데가 동서고금 꽤 된다.부산의 평림은 불가사의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간 혜성처럼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그걸 언급한 문헌을 아직 못 봤으므로 뭐라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평림이 지도에 등장한 때는 1800년대 후반. 그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4.10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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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白山)은 수영구 민락동 진산이다. 민락동 한가운데 있다. 민락동이 산을 떠받드는 형국이다. 지금은 옮겨간 부산문화방송과 전통사찰 옥련선원이 여기 있다. 산 저쪽은 수영강 강줄기와 이어지고 강 이쪽은 수변공원 바다다. ‘경치 대회’ 같은 데 나가면 일이 등은 떼놓은 당상이다.‘백산만취(白山晩翠).’ 떼놓은 당상답게 백산은 일찍부터 수영팔경에 들었다. 소먹이는 목동이 버들피리 입에 물고 노을빛으로 돌아오는 만취(晩翠) 정경은 백산에 인간미를 더한다. 민락동이 떠받들고 수영이 떠받드는 이유가 산이 혼자 잘나서겠는가. 사람이 있기에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3.27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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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섭교(利涉橋)는 온천천 돌다리였다. 동래에서 수영으로 갈 때 이섭교를 건넜다. 조선시대 동래와 수영은 부산의 쌍봉이었다. 동래는 행정 중심도시였고 수영은 군사 중심도시였다. 동래를 다스리던 부사와 수영을 다스리던 수사는 계급이 같아 티격태격 곧잘 부딪쳤어도 큰 틀에선 긴밀한 관계였다.이섭교는 긴밀한 관계의 상징이었다. 이섭교를 건너 동래와 수영의 관리가 오갔고 이섭교를 건너 동래와 수영의 공문이 오갔다. 이섭교가 물에 잠기면 관리도 공문도 물에 잠겼고 이섭교가 떠내려가면 관리도 공문도 떠내려갔다. 그래서 이섭교는 부산의 어느 다리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3.13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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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현(馬飛峴)은 말이 날아다니는 고개였다. 빈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조선시대 대연동 국마장에서 울타리를 뛰쳐나온 말이 황령산 산길을 따라 이 고개를 넘었고 백양산으로 내뺐다. 울타리 갇히기 싫어서 죽으라고 내뺐으니 날아다니는 듯했으리라.한자가 어색한 필부는 모너머고개라 했다. 모너머는 못 넘는다는 뜻. 고개 넘는 게 어려워 ‘모너머, 모너머’였다. 험해서가 아니라 도둑이 설쳤다. 큰 도둑은 아니고 소 판 돈을 노리는 잔챙이 도둑이었다. 부산장에서 동래로 가는 필부를 노렸고 동래장에서 부산으로 가는 필부를 노렸다.그때의 부산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2.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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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우암(翻雨岩)은 마지막까지 숙제였다. 이 글 역시 쓰나 마나, 결정을 오래 미루었다. 여기에 실린 다른 글의 간격은 길어야 일주일 정도였는데 번우암 글은 직전 글과 무려 석 달 간격이었다. 번우암을 아예 뺄까도 생각했다. 그러기엔 미안했다. 번우암에 미안했고 번우암에 스몄을 몇백 명, 몇천 명, 몇만 명 부산 사람의 눈빛에 미안했다.번우암 글로 갈등한 이유는 사실 시시했다. 어디 있는지 몰랐다. 옛날 지도에도 나오고 조선시대 부산의 백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바위이지만 거기가 어디라고 특정하기가 난감했다. 지금은 사라졌나 보다, 그렇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2.1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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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작부터 갈등이다. 쓰나 마나. 쓰려니 소가 눈에 밟히고 마려니 소가 또 눈에 밟힌다. 쓰나 마나. 에라 쓰자. 써도 밟히고 안 써도 밟힌다면 저지르고 보자. 그런 심사로 시작한 게 이 글이다.부산진우시장. 일제강점기 부산진 범일정에 있던 소 시장이었다. 여기서 팔린 소는 일본에 실려 가서 생을 마쳤다. 조선 한우 우직한 발굽이 찍혔고 순한 눈매가 찍힌 순애보 현장이 부산진우시장이었다.부산진우시장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소와 가축뿐만이 아니라 전 조선의 가축을 사고파는 조선의 대표적인 우시장이었다.디지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1.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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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신발의 도시다. 1990년대 이전에도 그랬고 2020년대 지금도 그렇다. 해외에서도 성업백세를 누리는 지금과는 달리 1990년대 이전 그때는 한국을 대표하는 신발 대기업이 죄다 부산과 부산 근교에 있었다. 삼화를 비롯해 보생, 태화, 국제, 동양, 대양, 진양, 세원, 태광 등이었다. 이들 대기업은 부산지역을 기반으로 둔 세계적인 신발 대기업이었다. 말하자면, 신발의 세계 챔피언을 줄줄이 배출한 명품 도시가 부산이었다.“휴가 때 강원도 두타산에 갔더니 삼화사란 절이 있어요. 우리 회사와 한자가 같으니 삼화가 무슨 뜻인지 알아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1.1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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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스마트폰이었다. 고려면 고려, 조선이면 조선 그 시대 최고의, 그리고 초고속의 통신 시설이었다.조선의 경우 조선팔도 봉수대 없는 데는 없었다. 한 군데서 신호를 보내면 사방팔방 퍼져서 삽시간에 서울에 당도했다. 도중에 소홀히 하는 봉수대가 어느 한 곳이라도 있으면 국가적 재앙이 될 수 있기에 조선 오백 년 내내 1급 관리시설이 봉수대였다.전화가 들어오면서 1894년 폐지하기 직전까지 봉수대는 조선팔도를 지키던 뜨거운 불덩이였다.국경의 봉수대는 특히 중요했다. 적의 침범을 맨 먼저 알리는 첨병이 봉수대였다. 부산은 국경도시였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4.01.0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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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문 밖에 있던 야산(野山) 터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가장 먼저 이 고장에서 순사(殉死)하신 분들을 모신 전망제단(戰亡祭壇)이 있었던 곳.’동래를 걸어보면 곳곳에 표지석이 보인다. 무슨 무슨 다리 터며 무슨 무슨 성문터를 알리는 표지석이다. 이들은 동래가 조선시대 부산의 중심이었음을 알린다. 동래경찰서 담벼락 소공원 표지석은 여기에 야산이 있었다고 밝힌다. 야산을 헐어 평지가 됐고 지금은 경찰서가 들어섰다는 이야기다.야산 이름은 농주산(弄珠山).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니는 산, 그런 뜻이다. 용이라, 여의주라. 대체 어떤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12.2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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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부산에 있는 옛날 비석은 몇쯤 될까. 자그마치 300기가 넘는다. 조선시대 부산은 변방이고 갯가. 별다른 비석이 있겠나 싶어도 천만의 말씀이다. 비석은 역사의 중첩이며 문화의 누적. 300 넘는 비석만 봐도 부산은 분명 역사의 도시고 문화의 도시다. 낮고 가늘어 한 번 더 보게 되는 비석부터 높고 두꺼워 다시 보게 되는 비석까지 부산은 가히 비석의 도시며 역사와 문화의 도시다.부산의 비석은 옛날 지도에도 나온다. 좁은 지면에 그 많은 비석을 담는 건 역부족이었지만 당대가 주목하거나 표상이 될 만한 비석을 담았다. 대부분의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12.0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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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예부터 절이 많았다. 조선의 절골이었다. 부산이 절골이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우선 경주가 가까웠다. 신라는 불교국가였고 신라의 서울 경주는 불교의 기운으로 똘똘 뭉쳤다. 경주의 기운은 가까운 부산 구석구석 스며들었다.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다. 부산에선 엔간한 고찰은 신라 인연을 내세우고 원효며 의상을 내세운다. 전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게 경주 감포에서 배를 타면 부산은 한달음 거리였다. 방랑벽 두 스님이 부산에 자주 왔을 개연성은 높다.견강사(見江寺). 부산의 가장 오랜 지도에 등장하는 절이다. 1474년 ‘동래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11.2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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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도시 부산은 국경도시였다. 부산을 둘러싼 바다는 일종의 DMZ였다. 비무장 지대였지만 언제든지 화약고가 될 소지가 컸다. 섬나라 왜가 말썽이었다. 호시탐탐 조선의 해안을 노렸다. 그래서 관계가 늘 팽팽했다. 시대를 달리해 가며 부산 곳곳에 성을 세워야 했다.. 부산박물관이 2016년 펴낸 단행본이다. 부산박물관 학술연구총서 51집으로 발간했다. 부제 ‘보루를 쌓아 근심을 없애다’에서 보듯 부산의 성은 한반도 해안방어의 최일선이었다. 성은 부산의 근심을 없애고 조선의 근심을 없애는 듬직한 보루였다.성은 애초 자연과의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11.0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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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다용도였다. 자가용이었으며 통신용, 군사용이었다. 기차가 머물다 가는 역(驛)이란 한자도 말에서 나왔다. 역은 공적인 용무로 한참을 달린 말이 쉬어가는 공공기관이었다. 조선팔도 모두에 말이 있었으므로 조선팔도 모두에 역이 있었다.목장(牧場)도 그랬다. 조선팔도 모두에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고 역처럼 공공기관이었다. 부산도 곳곳이 목장이었다. 군부대 주변이나 말을 사육하기 좋은 초지에 목장이 들어섰다. 돌담으로 울타리를 둘러서 말이 달아나는 것을 방지했다.목장 명칭도 거창했다. 국마장이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목장이었다. 15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10.2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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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는 옛길이다. 평지가 드물던 그 옛날엔 다들 오르막 고개를 넘어 다녔다. 그것이 불편해 고개를 깎아서 평지를 내거나 고개 아래로 터널을 내었다. 그러므로 고개는, 개발되기 이전 지역의 원형이다. 고개를 되돌아보고 되새기는 일은 지역의 원형을 상상으로나마 복원하는 일이며 그 길로 다녔을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를 되돌아보고 되새기는 일이다.지금 부산에 남은 고개는 몇이나 될까. 부산이 광역 대도시고 개발될 대로 개발된 상태라 몇 되지 않으리라. 2020년 지역 일간지에 ‘부산의 고개’를 연재하기 전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10.1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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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룡산(牛龍山)은 남구에 있는 산이다. 나지막하지만 깊다. 민가에 스며든 산이면서 민가를 벗어난 산이다. 산책객에겐 부담이 적고 등산객에겐 가 볼 만한 산이다. 마을과 산 사이, 산과 마을 사이 울타리에는 ‘우룡산’이라 써놓은 경계 표지판이 곧잘 보인다.우룡산 이름 역시 나지막하고 깊다. 소가 들어가고 용이 들어간다. 민가에 스며든 이름이면서 민가를 벗어난 이름이다. 그런데 왜 소가 들어가고 용이 들어갔을까. 산 하나가 어떤 데는 소처럼 생겼고 어떤 데는 용처럼 생겼나? 이름 내력이 뭘까? 감이 잘 안 온다.지명 유래를 아는 이는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09.27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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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평지는 셋 중의 하나다. 원래부터 평지든지 바다를 메워서 평지든지 산을 깎아서 평지든지. 부산은 대부분 바다를 메운 평지다. 영도 대평동 매축지가 그렇고 범일동 매축지가 그렇다. 송도 아랫길도 바다를 메운 평지고 부산 곳곳의 부두도 원래는 바다였다.산을 깎아 평지가 된 곳도 적지 않다. 영주동 일부는 영선산을 깎아 평지가 됐고 양정 송상현광장은 모너머고개를 깎아 평지가 됐다. 범일동 부산진시장 뒤편 영가대 터도 그렇다. 지금은 평지지만 일제강점기 그때만 해도 바닷가 둔덕이었다.영가대(永嘉臺) 터는 특이했다. 연구 대상으로 삼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09.1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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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동네 친구가 꽤 된다. 부산에도 꽤 되고 타지에도 꽤 된다. 타지에서 글 친구가 오면 대개는 바다로 간다. 광안리나 해운대 바다로 가서 싱싱한 회로 회포를 풀면 다들 ‘진심으로’ 감동이다. 바다를 끼지 않은 서울 같은 데서 오는 친구는 감동이 수평선까지 닿고 하늘까지 닿는다.시비를 거는 친구도 있었다. 서울내기였다. 어디 가도 그런 친구는 있기 마련이지만 글 동네는 좀 고단수다. 안 그런 척하면서 할 말 다 하고 좋은 말 같은데 곰곰 들여다보면 속을 뒤집는다. 서울 살아서 그런지 한국의 중심에서 활동한다는, 쉽게 말해 ‘내가 중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08.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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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溫井)은 따뜻한 샘. 온천수 솟는 욕탕을 이른다. 부산은 동래며 해운대며 옛날부터 온정이 유명했다. 일종의 지역 특산이었다. 특히 동래 온정은 핫 플레이스였다. 부산 고지도는 엔간하면 동래 온정을 표기했다. 온정이라 적고선 보기만 해도 뜨거워지는 붉디붉은 반점을 찍었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외지 관광객을 부산으로 불러들이는 미끼상품 같았다.오시(午時)에 온정의 욕소(浴所)에 도착하였다. 동래부사는 지난봄에 이미 선생께서 이곳에 와서 목욕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2실(室) 1청(廳)의 초옥(草屋)을 별도로 건립하였는데 매우
동길산의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
편집위원 동길산
2023.08.1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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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뢰등대는 한자가 좀 어렵다. 스마트폰 옥편에 찾아보면 사다새 제(鵜), 여울 뢰(瀨)로 나온다. 사다새는 설명을 붙이면 길다. 오리처럼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 있는 새 정도로 알자. 지금은 등대가 육지에 있지만 처음 세울 때는 먼바다 암초 위에 있었다. 오리여울로 불리는 암초라서 제뢰등대란 이름이 붙었다.제뢰등대는 부산 최초의 등대다. 지금 남아 있는 등대 가운데 그렇다는 이야기다. 1900년대 들어 부산 최초 등대는 1904년 8월 세운 부산도등(導燈)이다. 도등은 입항하는 배가 안전하게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유도등이다. 앞과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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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동길산
2023.08.02 0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