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이 구부러지다
동길산
마루에 앉아 산길을 보네 산으로 올라가는 길과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 중간중간 만나 구부러지네 나무는 구부러져 자라네 나는 새는 구부러져서야 내려오네 마루에 앉아 나도 닮아가네 등이 구부러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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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커니. 산골생활 20년을 적은 산문집 제목이다. 2012년 펴냈으니 산골생활은 그 20년 전인 1992년부터 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초반.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산골의 하루하루는 매사 어설펐고 매사 어리숙했다. 아침에도 그랬고 저녁에도 그랬다. 낫질이 어설퍼 마당엔 잡풀이 웃자랐고 장작에 불붙이는 게 어리숙해 방은 냉골이었다. 매사 그랬다. 버릴 수 있으면 버리고 싶었고 달아날 수 있으면 달아나고 싶었다.
나를 붙잡은 건 경치였다. 버리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심사를 산골 풍광이 다독여 주었고 붙잡아 주었다. 풍광은 아침과 저녁이 달랐고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달랐다. 그러기에 하루하루 넘길 수 있었고 한 해 한 해 넘길 수 있었다. 경치에 싫증을 낸 날은 어느 하루도 없었다.
“집은 허름해도 풍광은 경남 최곱니다.”
산골 지내기가 어떠냐고 누가 물어오면 풍광을 들먹였다. 말은 경남 최고라고 했어도 내심 천하제일이었다. 진정성 없어 보일까 봐 낮추었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풍광은 없지 싶었다.
마루는 최고의 전망대였다. 산 아래 첫 집이라서 마루에 우두커니 앉으면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저수지 너머가 다 보였고 저수지 이쪽저쪽을 감싸는 산이 다 보였고 저수지와 산 사이로 간신히 이어지는 길이 다 보였다. 마루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산골사람이 되어 갔다.
지금도 하루의 많은 시간을 마루에서 보낸다. 글도 대개는 마루에서 쓰고 손님이 오면 대개는 마루에 상을 차린다. 글을 쓰면서 틈틈이 풍광을 보며 손님에게는 풍광이 환히 보이는 자리를 내어 준다. 당신이 와도 그러리라. 가장 환한 당신. 가장 환한 자리에 당신을 앉히리라. dgs1116@hanmail.net
▶동길산=도시와 산골을 오가며 사는 시인.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등 시집 여섯 권. <우두커니> 등 산문집 다섯 권 발행. 2020 김민부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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