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은 '통일의 선로'다

이광우 대표/발행인(전 부산일보 이사)
이광우 대표/발행인(전 부산일보 이사)

지난 2000년 겨울. 시베리아횡단열차(TSR)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했다. 27박 28일. 남북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을 염두에 두고 사전답사를 한 것이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다-1 참조)

중국을 제외한 러시아만의 여정은 모스크바-(우랄산맥)-예카테린부르크-노보시비르스크-이르쿠츠크-하바롭스크였다. 1만km 정도.

당시에는 TSR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부산에서 유럽까지 화물을 보낼 때, 배로는 30~40일 걸리지만 TSR을 이용하면 10~11일밖에 안 걸린다, 는 정도만 풍문처럼 알려져 있었다. TSR의 안전성, 열차의 모습 같은 기본적인 내용도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여행상품이 생기고 일반인들이 다니기 시작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 여행객의 감성과 화물 주인의 입장을 동시에 염두에 둔 채 취재를 해야 했다.

우선 자료를 확보해야 했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산하 교통개발연구원에 문의를 했다. 안병민 부원장은 “자료가 없다”면서 “취재를 잘 해서 자료를 좀 챙겨 달라”고 오히려 부탁을 해 왔다.

국내 언론이 취재를 안 한 건 아니었다. KBS가 답사를 한 적이 있는데, 취재가 안 됐다고 했다. KBS는 교통개발연구원의 조악한 자료화면을 빌려서 방영했다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혹은 시베리아는 그런 곳이었다. 폐쇄적이었고, 위험한 곳이었으며, 가난했고, 겨울 날씨는 혹독했다. 하지만 우리는 시베리아로 가야 했다.

취재 결과는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안 부원장은 기사를 보고 놀라워했다. 한동안 나는 시베리아에 관한 한 권위자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취재원들은 협조가 잘 되었고, 운도 좋은 편이었다. 귀국길에 중국 만저우리(滿洲里)에서 날벼락을 맞긴 했지만, 아무튼.

대륙횡단철도 연결 노선도(자료: 국토교통부)
대륙횡단철도 연결 노선도(자료: 국토교통부)

■첼코 철도부 차관 “러시아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공항을 이륙했다. 러시아 비행기 아에로플로트였다. 모스크바까지 9시간 정도 걸렸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모스크바 사무소로 갔다. 해외취재 때면 대사관과 코트라의 도움을 받곤 했다. 사전에 인터뷰 대상자와의 일정 조율과 통역 겸 안내인 섭외를 부탁하곤 했다. 이번엔 코트라였다.

코트라에서는 훌륭한 통역 겸 안내인을 섭외해 두고 있었다. 신광희란 재러동포였다. 러시아식 이름은 니키타 신. 첩보영화 주인공 이름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그곳에서의 별명이 ‘러시아의 해결사’였다.

니키타 신은 충청도 출신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자손이었다. 고교 졸업 후 혈혈단신 모스크바로 건너가 스스로의 삶을 개척했다고 하니, 그 간난고초가 오죽했으랴 싶었다.

코트라의 자랑대로 니키타 신은 다부진 체격에다 명석했고, 배짱이 두둑했으며, 책임감이 강했고,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저돌적으로 돌파하며 해결해 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북한 평양으로 가는 시베리아횡단열차(사진: Flickr).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북한 평양으로 가는 시베리아횡단열차(사진: Flickr).

우리는 러시아 철도부(MPS)를 찾아갔다. 첼코 알렉산드르 비탈리예비치 1차관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참고로, 러시아 철도부는 ‘제2의 국방부’라 불린다. 러시아는 전체 화물의 85%가 철도를 통해 운송되고, 국민 대다수가 열차로 이동을 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철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곧 전시 상황을 맞았다는 뜻이 된다.

첼코 차관은 유력 일간지인 이즈베스티야와 인테르팍스통신을 비롯한 주요 언론사 기자 7명, 일본 교도통신 특파원 1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취재팀의 존재를 알려줌으로써, 한국이 TSR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당시만 해도 러시아 정부는 TKR-TSR 연결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홍보에도 신경을 썼다. 화물 운임, 통관세, 관광 같은 데서 오는 경제적 이익 때문이었다. 내가 앞에서 '운이 좋았다'고 한 건 그런 배경 때문이다.

일본 특파원이 참석한 게 인상적이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한일 해저터널’ 혹은 ‘러일 해저터널’ 개설을 희망해 왔다. 해저터널과 대륙의 열차를 연결하면 ‘섬나라’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날 일본 특파원은 나와 첼코 차관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면서 메모만 했다.

첼코 차관은 도발적인 첫마디를 던졌다. 

“한국은 러시아가 남북한의 통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말의 배경은 이러하다.

첼코 차관은 지난 1999년 10월 평양에서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철도와 관련된 모든 기술과 시설, 재정 등 제반 사항을 지원할 테니 반드시 경의선을 복원하라”고 당부했다.

요컨대, 경의선이 복원되고 TKR와 TSR가 연결되면 세계 각국의 화물이 남북한을 무시로 드나들고 관광객 수 또한 급증하게 될 것이므로, 한반도의 긴장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터인데, 그 기초를 러시아가 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인터뷰 겸 간담회가 끝나고 나서 철도부에서는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답사할 지역과 취재 내용을 설명하면서 지역 철도청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덕분에 우리는 각 지역 철도청에서 환대 수준의 협조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푸틴 대통령은 이 프로젝트를 매우 중시했다. 철도부가 우리에게 유달리 호의적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듯하다. 푸틴의 지금 입장이 궁금하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아고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